BIBLE(성경) 전체 요약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 개관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 문헌 모음집이다. 유대교에서는 타나크 정경(구약) 책들을 경전으로 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 집필된 책들을 신약으로 추가하여 경전으로 삼고 있다.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구약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당신도 알다시피 구약성서는 본디 유대교의 경전이다. 유대교의 전통적 증언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유대민족의 구전 전승들이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성서학계에서는 문헌 작성 연대를 훨씬 나중으로 책정한다. BC 8세기 말 히스기야(기원전 715~687 재위) 왕의 황금기 때 글의 확산과 서기관들의 수와 활동이 대폭 늘어나 그때까지 구전되던 성서의 기록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잠언 25장 1절에 있는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라는 기록이 그 유력한 증거다. 물론 보다 이후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들은 BC 583년에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기원전 605~562 재위)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되면서부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서 기록에 힘쓰게 되었다고 본다.
이 같은 견해들을 집대성한 독일의 신학자이자 19세기 성서비평 연구의 최고권위자인 율리우스 벨하우젠(1844~1918)은 먼저 두 가지 원자료, 즉 신을 ‘야훼’라고 부르는 J문서와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E문서가 합쳐졌고, 여기에 D문서(신명기)가 추가되었으며, 마지막으로 P문서(제사장계 문서)가 바빌론 유수 이후에 덧붙여져 오늘날 모세오경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구약성서 각권의 히브리어 필사본들이 두루마리 형태로 돌아다녔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와 연관하여 중요한 것은 BC 3세기에 만들어진 ‘70인역’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약성서 저자들과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대부분 사용했던 구약성서였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최초로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서다. 그것은 당시 이집트와 유대땅을 포함한 시리아 일대를 지배했던 프톨레미 2세(기원전 285~247 재위)가 유대인 12지파에서 각 지파당 6명씩 총 72명의 장로를 알렉산드리아로 초빙하여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해서 만들어졌다. ‘70인역’에는 히브리 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몇 개의 ‘외경’이 들어있는데, 이 외경들은 기원후 90년 유대교 지도자들이 암니아에서 모여 확정한 ‘히브리 성서’에서는 제외되었다. 하지만 4세기경 가톨릭 성인 히에로니무스(345~419)가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서’에는 7권의 외경이 다시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카르타고 공의회(397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에서 공인되어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는 구약성서의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히브리 성서의 전통을 따라 이 외경들을 구약성서에서 뺐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46권을, 프로테스탄트에서는 39권을 구약성서로 사용하는 까닭이다.
신약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사해문서의 일부
신약성서가 확립된 과정은 이보다 단순하다. 1세기 중엽에 벌써 바울의 서신들의 필사본이 교회에 소장되어 예배에 쓰였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늦게 이뤄졌다. 예수의 죽음 직후에는 그것이 그리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직접적 목격담이 점점 희미해짐에 따라 기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로마 기독교인들이 베드로의 동역자(同役者)였던 마가에게 부탁하여 ‘마가복음’이 쓰여졌고, 조금 후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기록한 두 개의 역사서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왔다. 이어 이방인 설교에 중점을 둔 ‘마태복음’이 시리아에서 발견되었고, 1세기 말엽에 ‘요한복음’이 에베소에서 나타났다.
이후 다양한 기독교 문서들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당시 존재했던 기독교 여러 종파에서는 자기들의 고유한 교리에 합당한 문서만을 골라 편집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단으로 정죄된 마르시온(85~160년)이다. 2세기 한때 정통 교단을 위협할 만큼 커다란 세력을 가졌던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서신들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다. 이에 반발한 폴리카르푸스, 이레내우스 같은 교부들이 이단을 반박하고 정통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기독교 문서들 가운데 올바른 것을 선별하는 기준을 정하고(‘사도적 전승’이라 한다), 그에 따라 성서의 목록을 확정하는 작업에 나섰다(‘신약성서의 정경화’라 한다).
그 결과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 3개의 목회서신들은 비교적 나중에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되어 정경에 포함되었다. 3세기에는 빌레몬서를 비롯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1·3서, 야고보서, 유다서 등과 바르나바서, 목자, 디다케 등도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에 의해 정경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는 후일 정경성을 인정받지 못해 다시 제외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한 사람은 4세기 말 동방정교의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5~373)였다. 서방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397년)에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의 성서는 오늘날처럼 찾아보기 쉽게 ‘장’과 ‘절’로 구분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성서를 주간별로 구분해서 낭송하였지만 장과 절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11세기에 훗날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소르본대학의 랑통 교수가 장 구분을 먼저 완성했는데, 1226년에 파리대학 교수들이 그것을 성경에 적용했다. 절 구분은 훨씬 뒤에 로베르 엔티엔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쇄공이었던 그는 15세기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만든 절 구분법을 사용하여 신구약성서 전체에 절을 표시했다. 신구약성서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것은 1555년에 출간된 스테파누스의 불가타 성서다.
정리하자면, 성서는 어느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수많은 필사자들이 1000년 이상에 걸쳐 쓰고 고치고 다시 베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성서는 세상 그 어떤 책보다 사람의 입김과 손때가 많이 묻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성서를 여전히 신의 말씀이 담긴 성스러운 책으로 권위를 내세운다. 그것이 과연 정당할까?
성서는 신의 말씀인가
기독교가 성서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내세운 교리가 있다.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과 ‘성경무오설’이다. 축자영감설은 성서가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인간적 기원의 표시들이 지워질 수 없이 각인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의 말씀, 즉 신의 생각과 의지가 적절하게 표현되도록 성령의 영향 아래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모든 성경은 신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디모데후서 3:16)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그 근거다. 성경무오설은 축자영감설의 결과로 나온 것으로서 성서 안에는 그릇된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유는 역시 바울의 교훈대로,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히브리서 4:13)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히브리서 6:18) 그렇다 한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옮긴 성서의 저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 않겠냐는 질문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성서의 저자들이 어떤 ‘인식론상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오류로부터 보호받았다고 답한다. 물론 그 기적을 일으킨 주체는 성령이다.
한마디로 성서가 신의 말씀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기독교가 견지하는 전통적 교리다. 대표적 예로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는 1893년에 발표한 칙서 ‘섭리하시는 신’에서 “교회가 성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정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책과 각 권 전체는 성령의 구술에 따라 씌어졌다”라고 선언했다. 또한 종교개혁자 칼뱅(1509~1564)도 ‘신앙고백서’에서 “신의 뜻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발언되는 것이다.… 그들의 입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참되신 신의 입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익히 경험했듯이, 기독교 교리들이 가진 근원적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회장도 믿기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에 대한 기독교 측 답이 있다. 무척 오래 되었지만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대답은 2세기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30)가 했다. “믿으면 안다”라고! 11세기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같은 말을 뒤집어 “믿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라고 반복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알면 믿겠다’는 생각을 가진 일반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폐적으로 들릴 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성서의 권위 문제에 관해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근대 이후 기독교 내에서도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에 대한 이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성서에 오류가 있는 이유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성서의 저자들이 직접 쓴 ‘원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한 이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난 훗날 만들어진 필사본들이다. 당연히 그것들은 원본문의 사본도, 사본의 사본도 아니고 수없이 재필사된 것들이다. 때문에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필사본은 하나도 없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수백 또는 수천 군데나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필사자들이 ‘실수로’ 혹은 ‘고의로’ 본문을 여기저기 바꾸어가며 베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사 성서의 원본문이 신의 영감으로 아무 오류 없이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필사본들과 그것을 근거로 한 오늘날 성서 안에는 오류가 없을 수 없다. 구약성서는 말할 것조차 없고 신약성서 안에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만한 자료들이 숱하게 많다. 그중 한둘만 예로 들면 이렇다.
신약성서를 보면,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불과 한 달 뒤에 바로 나사렛으로 돌아와 정결예식을 행했다(누가복음 2:39)고 하는 반면, 마태는 그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마태복음 2:19~22)고 증언한다. 또 마가는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한 후에 십자가에 달렸다(마가복음 14:12, 15:25)고 하고, 요한은 유월절 식사 전에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요한복음 19:14)고 말한다. 또 바울은 자기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후에 곧바로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누가가 쓴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다마스쿠스를 떠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되어 있다(사도행전 9:26). 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실수에서든 고의로든 저자가 잘못 기록했거나 필사자들이 잘못 옮겨 베낀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성서는 성령의 영향 아래 오류가 전혀 없이 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성서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들의 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성령에 의해 끊임없이 구현되는 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성서는 신의 말씀인가
당신의 생각을 돕기 위해 연관된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 중 흥미로운 하나가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신의 역사’에서 밝힌 견해다. 암스트롱에 의하면, 신 자체에게는 역사가 없지만 성서에 나타난 신은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역사는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표현 불가능한 신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어떻게 인식해왔는가에 대한 역사”일 뿐이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성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성서는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표현 불가능한 신의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이다.
케빈 벤후저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이 “성서는 신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의 의사소통 중에 있는’ 신의 말씀”이라고 보는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 성서는 신의 말씀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의 소통 가운데 인간에게 이해된 신의 말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 설령 저자나 필사자들에 의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성서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부단히 새롭게 주어지는 현실적 상황에서 성서가 인간과 세계 구원이라는 신의 섭리를 구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서가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말씀이라는 증거이고, 아니면 아니다. 그럼 물어보자. 오늘날 성서는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성경의 형성과정
성경의 정경과 외경
성경의 정경과 외경이 정해진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유대교와 교회의 논의와 검토를 통해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이외에 인류에게 역사하실 때 직접적으로 역사하기 보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벧후 1/20~21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난 것이 없나니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
성경도 하나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통해 기록하셨습니다.
시편 12/6~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
저는 하나님이 성경이 쓰여질 때 뿐만 아니라 성경이 보존되고 필사되고 번역되고 정해지는 과정에까지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믿습니다. 정경과 외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정경의 형성과정
Ⅰ. 정경의 정의
성경은 어느 한 저자가 장문의 단일한 책을 쓰는 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문학장르를 달리하는 66권의 책으로 된 일종의 전집물이다.
더욱이 각기 개성, 교육정도, 시대, 공간적 배경을 달리하는 약 40명의 저자들이 성경이라는 전집물을 만들려는 의사가 전혀 없이 각각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고 기실은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성경 모든 내용의 주체가 되시고 성경기록 과정에서도 영감으로 간섭하셨다.
따라서 성경 66권의 직접적인 저자는 모두 다 하나님 한 분이신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형식적으로는 66권이지만 내용적으로는 1권의 책인 셈이다.
그러면 자연히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왜 그 많고 많은 문서 중에서 굳이 66권만 성경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보다 세부적으로 물으면, 66권 각 권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성경임이 증명될 수 있는가?
그 기준 자체는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가능하다. 이상의 문제와 관련된 연구가 정경론이다.
정경(Canon)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논(χανων)이다.
카논은 원래 갈대, 긴 나무가지라는 뜻이다. 정확한 자(尺), 즉 길이를 재는 도구가 없었던 고대에는 이런 것들을 자의 대용품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카논은 결국 어떤 것을 재는 기준, 척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성경이 성도의 인식과 행위의 척도가 된다는 측면에서 그 영감성과 계시성이 인정된 성경을 정경 곧 카논이라고 부른다.
또 66권만을 정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정경의 기준을 연구하고 정경의 기록및 수립—즉 정경의 형성과 전승 과정을 밝혀 정경으로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연구를 정경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Ⅱ. 정경의 기준
유독 66권의 성경만이 정경으로 인정되는 근거 또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답을 하는 방식은 객관적으로 확실성을 줄 수 있는 속성들이 성경 66권에 내재하여 있음을 확인하는 길이 최선일 것이다.
또 실제로 성경 66권은 모두 다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하여 그 정경성이 인정된 책들이다.
그러면 성경에만 고유한 것으로서 정경 인정의 기준으로 사용된 기본 속성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영감성 : 본문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 즉 그 내용의 신적 기원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② 목적성 : 말씀의 내용 자체와 그 기록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어야 한다.
③ 신뢰성 :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쓴 인간 저자의 신실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진실성과 성경의 기록자로서 하나님께서 흔연히 인정하셨는가의 의문에 관한 문제이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의 소명과 기름 부음, 신약의 경우 사도성이 바로 이에 속한다.
④ 보편성 : 본문의 내적 속성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어느 한 책이 정경성을 갖고 있다는 교회의 보편적 확증이 요구된다.
⑤ 보존성 : 성경 원본의 권위에 근거하여 그 본문이 신적 간섭에 의하여 훼손됨 없이 전달되어졌는가 하는 보존과정의 완전성이 요구된다.
한편 우리는 성경 66권 자체는 교회가 그것을 확증 공포하기 이전에도 정경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인증이란 결국 성경의 내적 속성에 대한 외적 인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 66권이 완전히 수집 공인되기까지에는 일부 책들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이는 인간 교회가 임의로 정경이냐 아니냐를 정하는 과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분명한 내적 속성을 공고히 확증하기 위한 작업 과정에 불과하였다. 즉 성경은 교회가 이를 정경으로 인정해서 정경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인간이 발견, 순복하도록 섭리하셔서 정경으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Ⅲ. 정경의 형성, 기록과 수집의 전과정
물론 정경 곧 성경 66권은 첫 책이 기록됨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책이 기록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정경의 형성이란 기록의 종결 이상을 뜻하는 것이다.
① 성령의 영감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인간 저자의 집필.
② 그 기록에 대한 정경 확립 이전 시대 성도들의 평가.
③ 공의회를 통한 교회의 공식적 인정과 선포.
이상의 전과정, 즉 기록과 수집 및 공인의 전과정을 정경의 형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성경 각 권이 기록 완료된 시기와 정경으로 공인된 시점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정경이 수집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숱한 외경과 위경의 등장, 심지어는 기독교 사상과 이단 사설을 교묘히 접합시킨 이단 서적의 등장으로 인하여 변증적 차원에서 참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구분할 필요성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 구약 정경의 형성
일단 공식적으로 현재의 구약 39권만 정경으로 밝힌 최초의 경우는 A.D. 90년경의 얌니아 랍비 회의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구약 전체를 지칭하면서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라는 말씀(눅11:51)을 주신 것은 A.D.90년 이전에도 이미 구약 정경의 범위에 대한 확증이 있었다는 결정적 암시가 된다.
왜냐하면 아벨의 기사는 창세기에 있고, 사가랴의 기사는 역대하에 있는데 히브리 구양 분류 방식상 창세기는 그 첫권이고 역대하는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눅11:51의 표현은 결국 구약 전체의 범위가 이미 확증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로 채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기록과 이스라엘 역사의 정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구약 정경의 형성 시기를 포로 이후 시대인 B.C.44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포로 귀환시대로서 느헤미야의 행정, 외교적 영도와 에스라의 종교적 지도 아래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지위가 회복되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하에서 학사 에스라와 당시의 장로 회의에 의하여 구약 정경의 범위가 확정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실 에스라 이후 시대, 즉 소위 중간사 시대에는 상당히 풍부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특성상 민족적 대사건이 분명한 정경 확립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고, 이미 정경의 범위가 확정된 상태임을 암시하는 기사만이 있는 사실도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한편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삼 단계 구약 분류 방식, 즉 율법(토라), 예언서(네빔), 성문서(케투빔) 이상 세 분류 방식의 순서가 정경 형성의 순서를 반영한다고 고등비평 학자들은 주장한다.
율법은 B.C.400년, 예언서는 B.C.300 ~200년, 성문서는 B.C.165 ~ 100년경 각각 수집과 편집이 끝나 정경으로 인정되었다는 소위 단계별 형성 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만약 고등비평학자들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인의 구약 분류 방식은 구약 정경에 관한 한 거의 철칙처럼 여겨져야 마땅하나 구약의 가장 중요한 역본인 70인역 조차 정경의 범위에서는 일치하지만 분류 방식은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2. 신약 정경의 형성
구약이 B.C.1400년경 모세 오경의 기록을 시작으로 B.C.400년 경의 소선지서,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의 시대차가 있는 반면, 신약은 27권 모두가 A.D. 50 ~ 100년 사이 즉 50년 상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신약 27권을 공식적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397년 칼타고 공회였다.
신약 27권은 기록 이후 교회의 중요한 이론과 실천의 기준으로서 존중되었다.
초대 교부들의 각종 기록과 교회와 관련된 각종 역사 문헌을 보면 신약 성경 27권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처음부터 다른 일반 문헌들 보다 높게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역과 개인에 따라 어떤 책은 보다 더 존중되고 또 어떤 책은 그 정경성을 의심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확한 정경의 지침이 있기 전까지는 오리겐 또는 유세비우스 등 영향력 있는 교부들의 분류방식이 매우 널리 유포되었었다.
이들 두 교부는 교회에 널리 전해오는 문서를 ‘호모루구메나’(Homolo-goumena : 고역된 또는 인정된 책들)와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이의가 있는, 논쟁중인 책들)로 크게 나누었다.
개인차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호모로구메나’에는 사복음서,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등이 포함되었고, ‘안티레고메나’에는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요한이.삼서 그리고 신약 외경 등이 포함 되었다.
한편 일부 교부들은 이 ‘안티레고메나’를 다시 구분하여 다만 그 정경성에 논란이 있다는 점에서 그냥 ‘안티레고메나’와 전혀 그 정경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노다’(Noda : 널리 알려졌으나 인정될 수 없는)로 보다 세분하였다.
그리하여 전자에는 히브리, 야고보, 베드로 후서 등이 분류되었는데, 이 책들은 지금은 신약 정경이지만 당시에는 논쟁의 대상 되곤 했던 책이다.
반면 ‘노다’에는 각종 신약 외경 문서들이 분류되었다.
이것은 일부 논쟁 대상이 된 책 들중 일부가 그 정경성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외경이나 그밖의 문서들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초대 교회가 처음부터 인정.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략적 구분만으로는 말시온(A.D.140년경) 등의 노스틱주의자들을 대표로 하는 이단주의자들과의 대외적 논쟁에서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전교회의 통일성에 완전을 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A.D.4세기 중엽부터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 A.D.393년의 히포 종교 회의 등 주요한 종교 회의를 거쳐 마침내 A.D. 397년 칼타고 종교 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 27권의 정경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랜드 종합주석 )
위경의 형성 과정
구약성서는 일찍부터 두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역 구약, 일명 칠십인역(LXX)이다.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는 소위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책들이 더 편집되어 있어서 가톨릭의 성서가 된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第二經典,deuterocanonical)’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을, 가톨릭에서는 ‘제1경전’ 혹은 ‘원경전(原經典,protocanonical)’이라고 한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책의 권 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제1경전 에스더기의 추가부분)’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바룩서’ 안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장으로 편집되어 있고, ‘다니엘서의 추가 부분’에는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영어개역표준성서(Revised Standard Version)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 ‘므낫세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이러한 책들은 본래 유대교가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인 ‘칠십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2경전에 속한 책들이 제1경전과 합본된 것은 기독교의 작업이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사와 관련된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 기독교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구약을 읽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 있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고대 라틴어역 성서(Old Latin Version)는 바로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에는 없고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에만 나오는 책들에 대한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문제삼기는 하였으나,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는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경에 들어 있는 39권 책과 동일하게 영감 받은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게 된다.
히브리어 구약에 들어 있는 39권의 책은 이미 경전으로 전해져온 것이므로 이것을 ‘제1경전’이라고 하였고, 그리스어 구약에 들어 있는 나머지 책들은 늦게 경전이 되었다고 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논의의 편의상 여기에서 ‘제1경전’ ‘제2경전’이란 말을 쓰지만, 이런 용어는 16세기 트렌트회의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의 기도’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는 불가타역 성서에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전으로 인정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불가타역은 이 세 책을 부록으로 취급하여 별도로 편집하였고, 나머지 책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 적절히 재배치하였다.
‘토빗트’와 ‘유딧’은 ‘느헤미야기’ 다음에, ‘에스더기 추가 부분’은 ‘에스더기’ 안에, ‘마카베오상’과 ‘마카베오하’는 ‘에스더기’ 다음에, ‘지혜서’와 ‘집회서’는 ‘아가’ 다음에, ‘바룩서’는 ‘애가’ 다음에, ‘다니엘서 추가 부분’은 ‘다니엘서’ 다음에 각각 편집해 넣었다.
개신교의 성경은 39권의 낱권으로 형성된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신교의 성서가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구약외에 신약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구약의 경우도 내용은 같지만 책의 분책과 배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는 ‘사무엘 상’ 과 ‘사무엘 하’로 나누지만 유대교 경전에서는 ‘사무엘, 한 권으로 구성하고 있다.
책의 배열에 있어서도 개신교는 욥기, 시편, 잠언등으로 되어있는데 유대교 경전에서는 시편, 욥기, 잠언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가톨릭과 다른 것은 가톨릭이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외경(外經)을 경건문학으로는 받아들여도 경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제2경전’으로 정착되었지만, 개신교쪽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 안에는 들어 올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개신교 목사들이 편집한 츄리히 성서(Zurich Bibel or Swiss-German Bible)(1527-1530)는 외경을 신약 다음에 부록으로 편집해 넣었다.
1534년에 끝난 루터의 독일어역은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엮어 넣고, 그 서문에 “외경은 경전과는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하였다.
1535년에 프랑스 개신교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발간한 성서도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넣고, 머리말에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진 구약에는 없지만 불가타역본에 들어있는 외경”이라고 언급하였다.
1535년에 카버데일(Miles Coverdale)이 번역한 영어성서도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즉 구약의 일부로 다루지 않고, 별도로 묶어 경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책임을 밝혔다.
1560년에 나온 제네바성서는 본문을 절로 나누어 출판한 최초의 성서일뿐만 아니라, 외경에 대해서도, 그 서문에서 개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서문에서, 외경을 두고서, 이 책들이 교회가 공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공인된 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경전이 확증하는 것과 같은 내용에 동의하는 한에서만 도움이 되는 책임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므낫세의 기도’만은 역대지하 끝에 편집해 넣은 예외를 보인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왕 역본(King James Version)도 외경을 경전과 구 별하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만 신약성서 관주(전후참조)에서 외경과의 관련구절을 여러번 언급하여 외경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가톨릭교회가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면서부터 개신교쪽에서도 외경에 대한 태도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에 이른다.
1562년에 영국교회가 발표한 39개조 종교조항 제6조는 “(외경은)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결정한 신앙고백 제1장 3절은 “외경은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므로 경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교회사 – 성경의 형성과 보존의 역사 1
성경은 1,600년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영어로는 바이블(The Bible)이라 한다. 바이블은 라틴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되었으며, 비블리아는 헬라어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으로 책을 의미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고대에는 갈대줄기를 엮은 ‘파피루스’에 글을 기록하였기에 그 책을 ‘비블로스’라고 했다. 또한 비블로스는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쥬베르’의 헬라어 이름이기도 했다. 그곳은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주요 수입항 역할을 했다. 최초의 성경 사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로 수입된 파피루스에 쓰여졌는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파피루스 원료를 편의상 ‘비블로스(byblos)’라 부르기 시작했고, 후에 글자가 ‘biblion’으로 바뀌어 ‘파피루스 두루마리’ 또는 ‘책’이라는 뜻이 되었다. 후대에는 ‘책 중의 책’이라는 뜻에서 성경(聖經)을 가리키게 되었다.
성경은 약 3,500년 전 모세로부터 약 1,900년 전의 사도 요한까지 1,600년 가량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66권의 책들은 신성한 계시인 정경(正經, canon)으로, 캐논(can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칸나(canna)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갈대를 의미하는 헬라어 카논(kanon)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카논은 자(ruler) 또는 측량 막대기(measuring stick)를 의미했는데, 길이를 재는 정확한 자가 없었을 때에는 갈대를 측정기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尺)는 후에 인증된 권위(recognized authority)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4세기 경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성경들의 목록’을 의미하는 데 캐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경’이란 진리와 신앙의 척도가 되는 최고의 텍스트를 말한다. 정경이라는 용어가 갖는 이상의 의미는 정경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정경 이외의 많은 다른 문서 자료들이 존재했음을 전제한다. 정경이란 용어를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율법서인 ‘토라’와 예언서인 ‘네비임’ 그리고 성문서인 ‘케투빔’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히브리어 구약 정경은 ‘타나크’라고 하는데, 세 부분의 알파벳 머리 글자를 모아서 붙인 이름이다.
성경이 원본과 사본
성경의 자필 원본은 유실되고 현재는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지만, 수많은 필사본들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하늘로부터 계시된 성경이 원본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초대교회에서는 자필 원본의 문서 자체보다 정확하게 전해진 말씀 자체에 더 가치를 두었다.
성경의 원본들은 오토그래프(Autograph)라고 부르고 사본들은 애퍼그래프(Apograph)라고 부른다. 성경을 복사하여 사본을 만들 때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이 일에 종사하게 되어 있었으나(신 17:18) 후에는 서기관들이 이 일을 맡았다(렘 8:8). 그들은 오로지 성경만을 그대로 필사하는 전문 필사자들이었다. 사본 성경의 수요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서기관들의 수도 많아지고, 또 성경의 필사가 전문화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도 서기관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은 19가지의 엄격한 규정을 따랐다. 양피지는 유대인이 만든 정결한 동물의 가죽만 사용할 것, 각 가죽종이는 같은 수의 단(段)으로 구분할 것, 한 단에는 48~60의 줄을 가질 것, 먹(墨)은 특별하게 제조한 검은 먹만 사용할 것, 글자나 단어를 기억으로 기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증된 사본을 보고 기록할 것 등이다. 하나님의 가르키는 ‘야훼’나 ‘엘로힘’을 기록할 때는 매번 펜을 경건하게 닦고 기록해야 했으며, 실수가 하나 생긴 경우에는 그 장(章)을 폐기해야 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중에는 다른 곳을 쳐다보지 말아야 하며, 왕이 들어와도 쳐다보지 말아야 했다. 그들의 필사 규정과 방법은 치밀했고, 필사자에 대한 감독도 엄격했다.
다음은 어느 랍비가 성경 필사자에게 엄중히 경고한 내용이다.
“너는 네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주의하라. 네 일은 하늘의 일이다. 사본에서 철자 하나를 빼거나 더하면 너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철저한 규칙 속에서 필사했기 때문에 사해 사본이나 마소라 사본의 기록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보존
성경의 원본은 가장 조심스럽게 보관되었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은 제사장들에 의해 지성소의 법궤 옆에 안치되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 “(신 31:24~26)
여호수아(수 24:26)나 사무엘 시대에도 그러했다(삼상 10:25). 성막이 없어지고 성전이 세워졌을 때에는 성경이 원본들이 성전으로 옮겨졌다. 열왕기하 22장 8절을 보면 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경 원본들을 법궤 옆에 보관한 데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기록된 두루마리 책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세상의 다른 책들과 거룩히 분리시켜 놓음을 의미했다.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 70인역(LXX)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BC 250년 경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70인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서신이 이 70인역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물인데, BC 250년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헬라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그런 일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고 한다.
70인역의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다고 전해지나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다. 유대인 중 성경 기록을 담당한 책임자는 신명기 17장 18절, 31장 24~26절과 말라기 2장 7절에서 증거하듯이 레위지파였기 때문이다. 70인역은 보통 영어로는 LXX로 표기하는데, 로마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L은 50, X는 10을 뜻하므로 이를 합하면 70이 된다.
70인역 구약 성경에는 450년 이후에 정착된 히브리 성서인 마소라 본문(Massoretic Texts)에 없는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apocrypha)이라 부른다. 또 70인역에는 마소라 본문보다 내용이 적은 책도 포함되어 있는데, 예레미야서는 마소라 본문의 예레미야서보다 1/8이 적다.
70인역은 카톨릭 성경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에서는 정경의 범위에서는 마소라 본문을, 책 배열 방식에서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구약 성경인 마소라 사본
고대 유대인들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글을 썼으며, 구약 성경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여 그것을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히브리어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대신 아람어가 통용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했는데, 히브리어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자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와 예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7세기부터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 ‘마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마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마소라는 ‘전통’ 혹은 ‘말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사르(masar)에서 나왔다.
마소라인들의 목적은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구약 성경의 순결성을 보호, 보존, 전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는 표준화된 히브리어 사본을 갖게 되었다.
10세기 말에 마소라 학자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은 AD 1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들이 만든 사본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900년경에 표준이 정해졌다. 마소라 사본 중 11세기(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은 히브리어로 구약 성서의 본문을 모두 담고 있어, 1세기 말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사본은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현재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사해 사본이 생겨난 지 1,100년이나 지난 시기에 필사된 것이지만, 원문에 훨씬 더 가깝게 베껴졌다는 것이 사본학자들이 공통된 견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구약 성경의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은 AD900년 경의 마소라 사본이었으므로, 구약 성경의 정확도에 대해 의혹을 가지는 학자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BC 400년경에 기록되었고, 마소라 사본은 그로부터 1,300년이나 지난 후에 쓰여진 사본이므로 사본의 정확도를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친히 지키신다고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21:33) 그리고 1947년 쿰란 동굴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다.
기원전 150년 경 기록된 사해 사본의 발견
1947년 봄, 사해 북방에 있는 쿰란 공동체의 동굴에서 굉장한 고고학적 보물이 발견되었다. 아랍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무하마드 아디브’라는 소년이 여리고 남쪽 사해의 서북쪽 2km 지점에 있는 황무지인 ‘와디쿰란’ 지역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었다. 그는 가파른 암벽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하고 잃어버린 양이 그 동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안에 돌을 던졌는데, 안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아마포(亞摩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들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었던 것이다. 몇 개의 항아리 안에는 양피지, 그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이 기름칠한 헝겊에 싸여 있었다. 그는 이것들이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돌아갔다.
얼마 후 그 두루마리들은 여러 골동품 상인들의 손을 거쳐서 4개는 시리아의 예루살렘정교회 대주교인 마르아티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3개는 베들레헴의 아랍 상인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수케닉(Sukenik) 교수가 구입했다. 1953년 수케닉 교수가 사망한 후,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을 지낸 그의 아들 야딘(Yadin)이 교수이자 고고학자가 되어 1954년에 사무엘 대주교에게서 두루마리 4개를 사들였다. 그리고 1967년에 두루마리 1개를 추가로 구입하여 사해 사본 두루마리를 모두 8개 보유했다. 현재 그 두루마리들은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존되어 있다.
탄소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조사 결과, 사해 두루마리들은 BC 168년에서 AD 233년 사이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본들 중 이사야서 두루마리의 일부분을 35mm 필름에 복사하여 유명한 히브리 고고학자이며 고대 셈어의 최고 권위자인 존홉킨스 대학교의 윌리암 알브라이트(Willim F. Albright) 박사에게 보냈는데, 알브리아트 박사는 연구 결과 이 사본이 BC150년 경에 기록된 구약 성경의 사본이라고 밝혔다.
알브라이트 박사는 사해 사본의 발견에 지대한 공을 세운 존 트래버(John Traver)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장 위대한 사본을 발견하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사본들이 나쉬(Nash) 파피루스(BC 2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 성경의 일부분)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시기는 BC 100년경으로 짐작됩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더욱이 사본의 순수성에 관하여는 추호도 의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사해 사본’, 혹은 ‘쿰란 사본’이라는 고문서다. 이 사본이 질그릇 항아리 속에서 약 2000년 이상 보관되었음에도 썩거나 많이 훼손되지 않은 것은 사해 주변의 건조한 기후의 영향이었다.
교회사 – 성경의 형성과 보존의 역사2
사해 사본의 가치와 중요성
지금까지 발견된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다. 사해 사본은 BC 2세기~BC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해 사본의 중요성은 발견된 후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 남아 있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AD 10세기에 필사된 이 사본들이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었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 어려웠었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 성경이 예수님 당시의 성경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사해 사본은 말라기가 기록되고 불과 3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필사된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말라기 기록 후 1300여 년이나 지나서 필사되었다’며 그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던 사람들에게 사해 사본의 발견은 그 공백기를 1000여 년이나 줄여놓은 것이다.
사해 사본과 1000여 년 후에 만들어진 마소라 사본, 이 두 사본이 얼마나 비슷한지 비교해본 결과 놀랍게도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소라 사본은 사해 사본과 똑같은 성경이고, 그 이전 성경의 원본과도 똑같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해 사본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동일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성경과 똑같은 성경인 것이다.
서기관들이 엄격한 규칙을 좇아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필사했기 때문에 사해 사본이나 마소라 사본의 내용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구약 성경을 지켜왔고, 신약 시대에도 왈도파(派)나 틴데일 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내했다.
얌니아 회의와 구약의 정경(正經) 확정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자 유대인들은 위협을 느끼고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게 된다. 그 중심에 유대교 최고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ai)가 있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의 대제사장으로, AD 66~70년 열심당원이 주도한 유대의 반란이 결국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유대교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당시 로마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 장군을 만나 최소한의 유대교 랍비의 존속을 허락 받는다. 그 후 AD 70년에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도시 얌니아로 대거 이주한다. 얌니아에 모인 율법학자들은 그곳에 율법 학교를 세우는 것과 종교 생활에 대한 보장을 로마 당국으로부터 허락 받는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후 얌니아는 많은 유대교 율법학자들이 활동하는 도시가 되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AD 90년경에 랍비들을 불러 모아, 얌니아 지방에 있던 ‘예쉬바(Yeshiva)’라고 불리는 유대인 랍비들의 아카데미에서 구약 성경의 정경(正經)을 결정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이 회의에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의 경전 목록, 즉 구약 성경의 정경을 확정한다. 이때 70인역 성경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부 책들은 제외되었다. 그런데 얌니아 회의는 정경 목록을 새롭게 확정한 것이 아니라, BC 400년경에 (일설에 의하면 에스라에 의해) 일차적으로 확정된 목록을 그대로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 후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경전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 천주교에서는 382년 로마 주교 회의에서 헬라어 70인역의 구약 성서 46권을 정경으로 인정했고, 이것을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에서 다시 확인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신약 정경화의 필요성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에 대한 신뢰감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또 다른 성경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직접 목도(目睹)하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면서 성도들이 그 증거를 믿고 따라서 살았으므로 주님과 주님의 사역에 대한 어떤 기록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들이 교회를 인도했을 때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머지 않았다는 기대가 강했기 때문에 신약 정경이 곧 만들어지지 않았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화 작업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AD 1세기가 지나면서 사도 시대가 끝나자 수많은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이단들의 책, 저자를 알 수 없는 내용이 변질되고 조작된 책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으려는 거짓 경전들의 출현은 교회로 하여금 신약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또한 후일에 ‘교회의 모든 문서를 불사르라’는 로마의 박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도 정경의 확립을 재촉했다.
신약 성경은 9명 가량의 기자들이 반세기에 걸쳐서 기록한 것으로, 내용별로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예언서로 나눌 수 있다. 신약 성경은 기자의 편지가 수신자인 교회나 개인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회람으로 각 지(枝)교회에서 읽혀지다가 (골 4:16), 후에 그 사본들이 집성되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현재 신약 성경의 사본으로, 부분적으로나 혹은 전체적으로 발견된 헬라어 사본은 모두 합하여 무려 5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 수많은 성경 사본들을 연구 조사하고 서로 비교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성경을 찾으려는 노력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한다.
신약의 정경화 과정
성경학자들은 신약 성경 27권 중 초대교회 때부터 승인을 받아온 20권을 ‘원경’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7권은 ‘대경’이라고 부르는데, 대경은 몇몇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약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후 4세기에 이르기까지 개개의 책들에 대해 속사도나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마침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문서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정경으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채택되지 않았을까? 어째서 어떤 문서들은 마침내 완전히 신약 성서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약 정경 27권의 목록은 동방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에 의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AD 367년에 자기 교구(敎區)의 여러 교회에 부활절 서신을 보내면서 오늘의 신약 성경 27권과 동일한 목록을 제시하였다.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동서 교회는 AD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 AD 393년 히포 종교 회의 등 주요한 종교 회의를 거쳐 마침내 AD 397년에 어거스틴의 주도 하에 열린 제3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가운데 하나는 교회 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결정된 정경 목록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서신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이후 열린 히포 교회 회의(419년)는 제3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신약의 정경화는 다소 시간과 과정을 거쳤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약 정경 확정의 기준
신약의 정경화에는 일정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첫째는,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신적 권위가 있는가?’였다. 이는 구약의 선지서들이 인정받은 방법으로, 기록된 말씀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도성이었다.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냐는 것이다. 사도들의 권위는 예수님에 의해 공인된 권위이므로 이 기준은 정당하다.
셋째는, ‘내용의 주제나 그 주제의 영적인 특징이 성경으로서 합당한가?’였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거짓문서들은 제거되었다.
넷째는, 보편성이었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섯째는, 영감성이었다. ‘그 문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가?’라는 것이었다.
여섯째는, 전통성이었다. 어떤 저작이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는지의 여부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 중심적인가?’라는 것이었다.
외경(外經)과 위경(僞經)
외경을 가리키는 ‘아포크뤼파(apocrypha)’는 ‘숨겨진’이란 뜻이다. 구약의 외경은 날조된 듯한 역사와 비도덕적인 내용, 그리고 출처불명의 전설과 환상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항상 성경 주위를 맴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고, 초대 교회 감독들 중에도 외경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들 가운데 이레니우스 같은 이는 외경을 정경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했고 , 제롬은 자신의 벌게이트 라틴역에서 가장 확실하게 외경을 정경과 분리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외경을 정경과 같이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중세 카톨릭 교회가 외경을 정경으로 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까지 발견된, 구약 정경의 목록이 언급된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AD 170년경 사데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가 만든 것이다. 그 안에는 구약 성경을 에스더만 제외하고 모두 열거하고 있는데, 외경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쿰란의 사해 문서에서도 분명히 외경은 정경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카톨릭은 ‘70인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현재 있는 70인역은 후대의 복사본(AD 325년)이며, 원래의 사본에 외경이 포함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유대인들조차 외경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해 사본 등을 비롯한 다른 증거들은 구약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카톨릭의 신약 성서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27권이지만, 구약 성서는 후대의 ‘70인역에’ 들어 있는 외경들을 포함시켜서 현재 카톨릭의 구약 성경은 46권으로 되어 있다. 카톨릭이 외경을 공식적으로 성경에 포함시킨 것은 1546년에 있었던 트랜트 공의회 때이다. 트랜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에 걸쳐 열린 카톨릭교회 회의였는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의 문제들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에 대항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나 연옥의 정당성, 또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근거를 갖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이다.
루터는 그의 독일어 성경에서 외경을 제외시켰으며, 이후의 번역 성경들은 거의가 외경을 제외시켰다. 개신교 정경은 외경을 제외한 히브리 성서 24권을 구약 정경으로 채택하되, 그 순서만큼은 70인역의 배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이유는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보다 70인역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마태복음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신약의 외경은 2세기에서 8~9세기의 기간에 쓰여진 것들이다.
위경(pseudepigrapha)이란 헬라어로 ‘거짓된 책’이라는 뜻이다. 위경은 외경과 마찬가지로 BC 200년에서 AD 200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완전 허구다. 위조 문서와 거짓 문서, 이단적인 교리가 기록된 문서들로, 초대교회의 감독들은 일찍부터 이것들을 정경에서 제외시켰다.